블루마운틴 코리아


현재 위치

  1. HOME
  2. STYLE
  3. BLUEMOUNTAIN TREND NEWS

BLUEMOUNTAIN TREND NEWS

MAGAZINE

  • 이미지형으로 보기
  • 리스트형으로 보기
  • 꼼 데 가르숑의 수장, 카와쿠보 레이(Kawa.. 작성자 : 블루마운틴 작성일 : 2017-09-08 꼼 데 가르숑의 수장, 카와쿠보 레이(Kawakubo Rei)레이 가와쿠보는 1942년, 도쿄에서 출생하여 게이오 대학에서 미술과 문학을 전공하였다.1964년 대학 졸업 후 일본에서 가장 큰 섬유화학 기업인 아사히 카세이(Ashahi Kasei)의 마케팅 부서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그녀의 주 업무는 텔레비전과 지면 광고물을 제작하는 일로, 섬유소재에 패셔너블한 이미지를 부여하여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었다.업무와 관련하여 패션계 사람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그녀는 1967년, 지인의 도움으로 일본 최초의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리랜서로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스타일링만으로는 그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고, 옷을 만들고 싶었던 그녀는 1969년,부인복의 제작과 판매를 통해 디자이너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브랜드명 없이 작업을 시작하였으나,1973년 마침내 그녀의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고, 꼼 데 가르송(Comme Des Garçons)이라는 브랜드가 탄생하였다.꼼 데 가르송은 프랑스어로 ‘소년들 같은(like boys)’이라는 뜻으로, 뭔가 특별한 의미가 담긴 듯한 명칭이었으나,단지 프랑스어의 어감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채택된 이름이었다. 가와쿠보는 정규 패션 교육이나 훈련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그녀는 보다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오랜 시간동안 스스로 천천히 키워온 미적 감각이 더욱 중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1975년, 감각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가와쿠보는 도쿄에서 첫번째 여성복 컬렉션을 개최하고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하였다.그녀는 건축가 타카오 가와사키(Takao Kawasaki)와의 협업을 통해 매장을 매우 특별하게 디자인하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그녀는 꼼 데 가르송 매장을 단지 옷을 사고 파는 장소만이 아닌 그 이상으로 만들고자 의도하였고, 그녀의 옷은 상품으로서의 성격을 극도로 배제한 채 마치 갤러리의 미술작품이나 인테리어 장식의 일부처럼 디스플레이 되었다.또한 그녀는 철저하게 본인이 의도한 방향으로 스타일링을 진행하여 카탈로그를 제작하였다. “나는 단지 나의 옷만을 고려하지 않는다.나는 액세서리와 패션쇼, 매장, 심지어 나의 작업실에 이르기까지 나를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단지 바깥으로 나온 미완성의 솔기나 검정색만이 아닌 꼼 데 가르송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라는 그녀의 말은 디자이너로서의 그녀의 철학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레이 가와쿠보는 파리 진출 이전 이미 꼼 데 가르송과 꼼 데 가르송 옴므를 통해 일본에서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40세라는 나이에 파리 진출 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였다. 1981년, 꼼 데 가르송은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Yohji Yamamoto)와 함께 파리에 첫 발을 내딛었다.당시 파리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차림새의 파워 드레싱과 ‘글래머러스’를 키워드로 하는 여성적인 이브닝 드레스가 유행하던 시기였다.그러한 주류 패션과는 반대로, 그녀의 첫 파리 패션쇼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안티 패션(anti-fashion)의 성격을 띤 의상들로 채워졌고, 이는 파리 패션계에 충격과 이슈를 불러왔다.
  • 영국 패션의 대모, "비비안 웨스트우드 (Vi.. 작성자 : 블루마운틴 작성일 : 2017-08-11 영국 패션의 대모, "비비안 웨스트우드 (Vivienne Westwood)"비비안 웨스트우드는 1941년 4월 8일 잉글랜드 더비셔의 작은 마을 글로솝에서 평범한 노동 계층 가정의 장녀로 태어났다.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펑크의 여왕이자 영국 패션의 대모로 널리 알려져 있다.그녀는 1970년대 런던 펑크 문화의 탄생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1980년대 이후에는 패션 디자이너로서 경력을 개척하는 가운데 역사와 전통, 문화,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지적 탐구의 과정을 작품 세계에 표현해왔다.웨스트우드에게 있어 패션 디자인의 의미는 고객의 목적과 요구를 해석하고 만족시키는 작업이 아니었다.그녀는 사회적 인습을 재생산하는 보수적인 주류 사회의 통념을 공격하고, 미래의 대안을 제안하는 적극적인 문화의 장으로서 패션의 잠재력을 탐구해왔다.이러한 반권위주의에 대한 열망은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지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웨스트우드는 영국 패션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과 1991년 연속으로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British Designer of the Year)'로 선정되었고,영국 여왕으로부터 1992년 OBE(대영 제국 훈장)에 이어 2006년 DBE 작위(2등급의 작위급 훈장)의 훈장을 수여 받았다.2003년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미술관에서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방대한 작품 세계를 정리하는 대대적 회고전이 진행되었다.전시회를 이끈 클레어 윌콕스(Clair Wilcox)는 웨스트우드의 삶을 이끌어온 것은 위대한 지적 호기심이었다고 언급하면서,"내가 진정으로 믿는 것은 문화뿐이다."라는 웨스트우드의 말을 인용하였다.비비안 웨스트우드는개성과 혁신을 추구하는 아방가르드 디자이너의 감수성과 여성으로서의 자의식,문화적 전통에 대한 향수를 혼합해 그녀만의 스타일을 창조해내었고, 옛 문화와 전통이 창조적 혁신의 재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그녀의 의상은 오늘날 패션의 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보존하고 확장시키는 기관인 복식 박물관들에서 꼭 소장해야 할 주요 품목 중 하나가 되었다.이러한 과거를 뒤로 하고, 웨스트우드는여전히 자신의 직관과 믿음에 따라 주류 문화의 독선을 거절하고 새로운 미래를 찾고자 하는 행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 평범함에 새로움을 추구하는 디자이너, "랄프 .. 작성자 : 블루마운틴 작성일 : 2017-08-04 평범함에 새로움을 추구하는 디자이너, "랄프 로렌 (Ralph Lauren)"랄프 로렌은 1939년 뉴욕 브롱크스(Bronx)의 유태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래 성은 리프시츠(Lifshitz)로, 유명한 랍비를 여럿 배출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도 세 아들 중 한 명은 랍비가 되어주길 바랐다.하지만 막내였던 랄프의 관심은 종교가 아닌 경제적 성공에 있었고, 그와 그의 형은 놀림거리가 되었던 성마저도 로렌(Lauren)으로 바꾸었다. 학창시절 로렌은 남다른 패션 감각으로 친구들의 주목을 받았다.로렌은 두 형들만큼 잘생기거나 운동을 잘 하지도 못했고 집안 또한 넉넉하지 않았지만,그는 항상 잘 다린 카키색 바지와 셔츠로 프레피 룩(preppy look: 미국 명문 사립고등학교 학생들의 교복을 본뜬 캐주얼 스타일)을 연출하였다.그의 트레디셔널한 브랜드와 룩에 대한 집착은 고등학교 시절 캠프 루즈벨트에서 일할 때 접한 부유층 유대인 학생들의 옷차림은 물론,영국신사 이미지의 영화배우 캐리 그랜트(Cary Grant)나 탭 댄스로 유명한 뮤지컬 배우 프레드 애스테어(Fred Astaire)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랄프 로렌(Ralph Lauren, 1939.10.14~)은 일반인들이 동경하는 상류사회의 스타일을 보편화한 디자이너다.그는 단순히 상류층 스타일의 의상을 소개하기보다 상류층의 라이프 스타일을 함께 제시함으로써,대중으로 하여금 그의 의상을 통해 누구나 특권층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이러한 환상 마케팅은 주류 계층으로의 편입을 꿈꾸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인종들로 구성된 미국인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였다.로렌 역시 가난한 유태인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자수성가하여 폴로 왕국을 이루어냈다는 측면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 가능성을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 늘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는 패션계 앙팡 테리블.. 작성자 : 블루마운틴 작성일 : 2017-07-28 늘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는 패션계 앙팡 테리블, "장 폴 고티에 (Jean Paul Gaultier)"프랑스 태생의 장 폴 고티에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달리 디자이너로서의 공식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그의 재능을 알아본 피에르 가르뎅에 의해 18세에 패션계에 입문하였다.피에르 가르뎅은 1970년 고티에가 보내온 스케치를 보고 그를 조수로 고용하였고, 고티에는 피에르 가르뎅, 자크 에스테렐, 장 파투등의 쿠튀르 하우스를 거치며 일했다. 쿠튀르에서 나와서 1976년 처음으로 자신의 컬렉션을 열었고, 1980년대 내내 ‘프랑스 패션계의 악동’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늘 뉴스를 몰고 다니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쿠튀르에서의 시간은 그가 흠잡을 데 없는 재단법과 테크닉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한편으로는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 디자이너에게는 전통적인 프랑스 디자인은 너무 조용하고 지루했다.1978년 첫 의상컬렉션을 선보인 이래, 고티에는 쿠튀르와 프레타 포르테 여성복, 남성복, 주니어, 향수 등으로 점차 라인을 확장해나갔고, 진, 안경 등 라이선스 사업도 확장해왔다. 피에르 가르뎅이 고티에의 재능을 알아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두 디자이너는 시대는 달랐지만,관습적인 디자인을 거부하고 재미가 넘치는 컬렉션으로 유명한 패션계의 전위부대였다.하지만 피에르 가르뎅의 디자인이 과거와의 단절을 통한 미래주의적인 디자인을 꿈꾸었던 반면,고티에는 과거의 유산이나 고전적인 디자인을 재료 삼아 자신만의 미학으로 새로움을 창조했다.실제로 고티에 디자인의 대표명사 격인 코르셋 패션이나 브레통 피셔맨 스웨터를 비롯하여 그의 컬렉션에는 기존에 존재했던 것들이 디자이너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 전혀 다른 패션이 된 사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고티에는 “나는 프랑스보다 영국에서 더 편하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런던을 흠모하는 파리지엔이었고, 그것은 디자인에 그대로 나타났다. 흔히 파리지엔의 이미지는 무심한 듯 고상하고 진중한 말투인데 반해, 고티에의 얼굴에는 늘 감정이 넘쳤고 좋은 것은 최상급을 사용하여 최대한 증폭해서 말했다. 그는 이것을 영국에서만 찾을 수 있는 특이한 유머와 연결시켜 설명했다. 또한 영국인 특유의 유머가 그들의 옷차림에 나타난다고 했다.고티에는 “영국인들은 자신을 우습게 보이도록 연출하는 반면, 프랑스인들은 언제나 심각하고, 세련되고, 관례에 맞춰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영국인들의 혁신성과 유연성이 그의 전위적인 패션 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티에의 디자인은 런던의 펑크룩처럼 파격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과감한 노출과 메이크업, 의외의 무대 연출로 충격을 주지만, 그가 즐겨 사용하는 색채인 아이보리, 새먼 핑크등을 살펴보면 고채도의 원색은 피하는 프랑스 문화의 세련됨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 클래식패션을 세계 기여한 미국 대표 패션디자이.. 작성자 : 블루마운틴 작성일 : 2017-07-21 클래식패션을 세계 기여한 미국 대표 패션디자이너, "캘빈 클라인 (Calvin Klein)"캘빈 클라인은 랄프 로렌, 도나 카란과 더불어 20세기 말 아메리칸 스타일의 성장과 세계적 확산에 기여한 미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그는 아메리칸 디자이너 스포츠웨어를 시대 정신에 맞게 새롭게 선보였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재단과 뉴트럴 컬러에 기초한 모던하고 세련된 스타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를 대중적으로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진과 향수, 언더웨어 비즈니스 등에서 진행된 과감한 홍보 전략이었다.누드와 성적 표현의 금기에 도전한 캘빈 클라인 광고는 큰 논쟁을 불러 일으킨 동시에 캘빈 클라인의 상표에 차별화된 아우라를 만들어내며 거대한 패션 제국을 건설하는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캘빈 클라인의 의상들은 아메리칸 클래식 스타일, 미니멀리스트 패션으로 조명되고 있으며 평론가들은 그를 시대를 앞서 간 마케팅 천재로 평가하고 있다.
  • 하이테크 패션을 선보인 패션계의 철학자, "후.. 작성자 : 블루마운틴 작성일 : 2017-07-14 하이테크 패션을 선보인 패션계의 철학자, "후세인 샬라얀 (Hussein Chalayan)"후세인 샬라얀(Hussein Chalayan)은 패션계의 철학자, 지식인이라고 불리우는 패션 디자이너이다. 1993년 등장한 이래 그의 패션 작품들은 단순히 소비되는 상품이 아니라 수많은 전시회, 논문, 책의 주제가 되어 왔다. 그는 기술과 인간의 관계,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이주에 대한 느낌, 시공간에 대한 개념,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첨단 기술과 결합시켜 마술과 같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샬라얀의 작품들은 ‘인체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관능미를 드러내게 해주는 도구’라는 전통적인 옷의 개념에서 벗어나 옷이 ‘인체를 둘러싼 환경’이라는 패션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스커트로 입혀질 수 있는 원형의 탁자, 전자식 기계장치가 장착되어 형태가 변화하는 드레스, 디지털 기술을 응용해 LED전구들이 빛을 발하는 드레스 등은 “과연 패션이 무엇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도전과 탐구의 소산이다. 후세인 샬라얀의 미래지향적이고 선구적인 작품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그는 2000년 미국의 타임지가 선정한 “21세기 가장 영향력을 떨칠 혁신가 100인”과 미국 보그(Vogue) 의 “다음 10년간 패션의 담론을 바꿀 디자이너 12인”에 선정되었다. 인류학, 정치, 역사, 문화적인 편견, 과학 등 패션 세계 밖에서 얻은 영감을 옷으로 표현하는 그의 작품 활동은 패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 패션계 흥행의 마술사, "마크 제이콥스(Mar.. 작성자 : 블루마운틴 작성일 : 2017-07-07 패션계 흥행의 마술사,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뉴욕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 1963.4.9~ )는 프랑스의 권위있는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Louis Vuitton)과 미국의 브랜드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를 이끄는, 세계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패션 디자이너 중 하나이다.레트로 패션, 대중 문화, 현대 미술 등 문화를 완벽하게 읽고 자신만의 아이디어와 디자인 철학으로 승화시킨 그의 디자인은 단순한 옷과 액세사리를 넘어서 하나의 문화가 되고 있다. 마크 제이콥스는 옷이란 고결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판매가 되어야 하는 상품이며 자신은 순수 예술가가 아니라 패션 디자이너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의 디자인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우고 있으며독창성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마크 제이콥스는 ‘상류층의 고급스러움과 거리의 천박함’이라는 양극단을 오가는 넓은 디자인 스펙트럼과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는 천재’라는 인간적인 매력으로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는 2010년에는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가장 영향력이 높은 인물 100인’에 뽑혔으며, 패션 이외에도 동성애 결혼 지지, 중국과 티베트의 분리 독립 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인 의사를 표명하기도 하고, 화려한 사생활로 인해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되고 있는 스타 디자이너이다.
  • 패션은 그 자체로 언어다, "미우치아 프라다(.. 작성자 : 블루마운틴 작성일 : 2017-06-23 패션은 그 자체로 언어다,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미우치아 프라다는 1948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프라다 창업주의 딸 루이사 프라다(Luisa Prada)와 해군이었던 아버지 루이지 비안키(Luigi Bianchi)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마리오 프라다는 1913년 ‘프라텔리 프라다(Fratelli Prada)’라는 가죽용품 회사를 창설하여 우수한 품질로 상류층 시장 공략에 성공하였다. 고가의 프라다 가죽제품은 한때 왕가에 납품할 정도로 뛰어난 품질과 디자인의 우수성을 인정받았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함께 인지도가 떨어지면서 사업이 난항에 처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마리오 프라다의 뒤를 이어 미우치아의 어머니와 이모가 경영을 맡았으나, 결국 1970년대 후반 회사는 파산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미우치아는 1977년 파산 위기에 놓인 프라다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사명을 띠고 ‘수석 디자이너’로서 가업에 동참하였다.그녀는 1985년 포코노(pocono) 나일론을 소재로 만든 토트백(tote bag)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사업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토트백은 어느 옷에나 어울리는 실용적인 나일론 가방으로, 새로운 패션 트렌드를 형성하여 패션업계의 그녀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89년부터 숙녀복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93년에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겨냥한 미우미우(Miu Miu), 1994년 남성복 워모(Uomo), 1997년 언더웨어 프라다 인티모(Intimo), 1998년 프라다 스포츠웨어를 출시하면서 사업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녀의 디자인은 평범하면서 고급스럽고 세련된 미니멀리즘의 경향을 보인다. 또 독특한 소재로 품격있고 지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실용적인 소재를 이용한 나일론 파카, 무릎 길이의 치마, 가는 벨트, 개버딘 밀리터리 코트 등은 패션계의 유행 경향과 상관없는 안티룩(anti look)의 특징을 보여준다. 프라다는 단일 운영시스템으로 제품을 디자인하고 생산하며, 품질을 엄격하게 관리한다. 모든 제품은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의 투스카니에서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전 공정이 이루어진다. 또한 제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라이센스 계약을 맺지 않는다. 1994년 오스카 패션상을 수상하였다.현재까지도 주목받고있는 이유는 현대적인 우아함과 견고함, 특히 행동파 여성들이 좋아하는 나일론가방이 바로 문제의 충격적 시도한 결과, 실용적이면서도 스포티한 스타이에서부터 우아한 이브닝 스타일의 의상까지 모두 커버 할 수 있는 다기능적이고도 정교한 디자인의 포토노 소재 핸드백과 액세서리가 완성되게 되었다. 프라다실루엣은 특별히 정의할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녀의 끝없는 행보가 기대가된다. 
  • 절제된 우아함을 표현한 무채색의 마술사, "조.. 작성자 : 블루마운틴 작성일 : 2017-06-16 절제된 우아함을 표현한 무채색의 마술사,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아르마니는 1934년 이탈리아의 북부에 위치한 피아첸차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우연한 기회에 밀라노의 라 리나첸테(La Rinascente) 백화점의 쇼윈도 디스플레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백화점에서 일을 시작한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패션을 직업으로 삼는 것에 대한 뚜렷한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였지만, 패션 분야의 여러 일을 두루 경험하면서 그의 창조적인 능력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그후, 몇년간의 프리랜서 디자이너 활동 후, 아르마니는 그의 에너지를 자신만의 고유 회사를 차리는데 헌신할 준비가 되었고, 마침 파트너 Sergio Galeotti의 제안으로 특별히 의상을 공식적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함께 회사를 차리게 되었다. 또한 1975년 6월 24일 그들은 조르지오 아르마니 S.P.A와 남성복과 여성복에 있어 기성복 라인을 런칭하게된다. 1981년에는 젊은 중산층 남성을 대상으로 한 "엠프리오 아르마니".감성적 캐주얼 라인의 '아르마니 익스체인지'를 런칭하고 아르마니 남성복, 아르마니 여성복, 엠포리오 아르마니, 아르마니 향수 등 거대한 아르마니 제국이라고 할만큼의 큰 명품으로 성장하게된다. 그러나 1985년 동업자 세르지오 갈레오티가 죽은 후 아르마니가 기업의 수장으로 본격적으로 나선 이래, 현재까지 5000명 이상의 직원과 전세계 500여 개의 매장을 거느린 거대한 패션 제국을 구축하였다. 거대 기업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동시대 다른 디자이너 브랜드들과는 달리 아르마니 그룹은 현재까지도 아르마니의 소유이며, 최근까지 이탈리아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기업으로 꼽힐 만큼 건재함을 과시한다. 조르조 아르마니는 지난 수십 년간 거의 변함없는 외모와 집중력으로 그 자신이 하나의 패션이 되었으며, 아르마니의 스타일 아이덴티티를 확고히 하였다. 살아있는 전설, 무채색의 마술사, 엘레강스 캐주얼의 창시자, 그가 바로 아르마니이다.
  • 샤넬의 미친 존재감, "칼 라거펠트 (Karl.. 작성자 : 블루마운틴 작성일 : 2017-06-09 샤넬의 미친 존재감, "칼 라거펠트 (Karl Lagerfeld)"칼 라거펠트는 독일 북부 도시 함부르크에서 스웨덴 출신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드로잉에 뛰어났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보다 혼자 책을 읽고 공상을 즐겼으며 예술과 옷에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었다. 1952년 프랑스로 이주한 독일인 칼 라거펠트는 1954년 국제양모사무국 콘테스트에서 코트 부문 1등을 수상하면서 파리 패션계에 입문하였다. 라거펠트는 1955년부터 피에르 발맹 하우스에서 견습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고, 3년 후에는 장 파투로 자리를 옮겨 5년 간 쿠튀르 컬렉션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라거펠트는 보수적이고 느린 변화를 추구하는 파리 쿠튀르의 세계에 점차 염증을 느꼈고, 결국 1963년 프리랜서 디자이너로서 독립해 자신의 비즈니스를 시작하였다. 이는 같은 경연대회에서 드레스 부문 1등을 차지하며 비슷한 시기에 쿠튀르에 입문해 디오르의 천재적 계승자로 부상한 이브 생 로랑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행보였다. 1961년 자신의 쿠튀르 하우스를 설립하게 된 이브 생 로랑과 달리 칼 라거펠트는 파리 패션계의 아웃사이더로서 마리오 발렌티노, 크리지아, 찰스 주르당, 슈퍼마켓 체인점 모노프리 등 다양한 브랜드를 위해 온갖 디자인을 제공하면서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라거펠트는 오늘날 여전히 샤넬 제국을 이끌고 있으며 펜디와의 협력 관계 또한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패션계의 멀티 플레이어로서 라거펠트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비엔나 궁정 극장, 몬테-카를로 발레단 등을 위한 무대 의상을 디자인하고, 마돈나의 콘서트 투어를 위해 의상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또한 단편 영화들을 제작하였고,2008년에는 유명 건축가 자하 하디드와 함께 패션과 현대 미술을 융합시킨 샤넬의 "모바일 아트"전을 기획해 새로운 문화 예술 트렌드를 이끄는 샤넬의 역량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2004년 H&M과의 컬래버레이션은 칼 라거펠트 상표의 효과를 여실히 보여주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2006년 K Karl Lagerfeld,2012년 Karl과 Lagerfeld를 런칭하며 젊은 세대를 위한 대중적 브랜드 개발에 적극 참여 중이다. 이처럼 지금까지도 그의 업적은 현재 진행중이다.
  • 전세계가 주목하는 장발 미남의 디자이너, "알.. 작성자 : 블루마운틴 작성일 : 2017-06-02 전세계가 주목하는 장발 미남의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 (Alexander Wang)"알렉산더 왕은 198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현재 미국의 뉴욕 패션 위크의 컬렉션중 가장 주목받고있는 디자이너중에 한명이다.  그는 19살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으로  넘어가 "틴 보그"와 "마크제이곱스" 인턴쉽을 하였다.  이후 2005년 자신만의 브랜드로 첫 런칭을 시작하였고, 그런 알렉산더 왕은 나이는 어리지만 기존의 예술적인 고정관념의 컬렉션의 틈을 깨고 스트릿패션 의류로 당당히 런웨이를 선보이며 새로운 패션계의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다. 수 많은 디자이너의 시선을 한몸의 받으며 이 시대의 최고의 디자이너로 그의 지금까지 활동은 엄청난 이슈를 몰고있다. 최근 H&M과 콜라보레이션을 선보이며, 해외에서는 물론 국내에서도 수많은 팬을 쌓아가고있다.
  • 크리스찬 디올 수석 디자이너, "라프시몬스(R.. 작성자 : 블루마운틴 작성일 : 2017-05-19  크리스찬 디올 수석 디자이너, "라프시몬스(Raf Simons)"라프시몬스(Raf Simons)는 디올의 수석디자이너 이며, 1968년 벨기에 출생으로 산업디자인 전공자였으나 가구나 산업용품 디자인에 큰흥미를 느끼지못하였다. 그래서 졸업을 앞두고 Waiter Van Beirendonck의 인터쉽에 지원하게 되면서 처음 패션계의 발을 들였다. 그 후 앤트워프 로얄 아카데미 패션학과 교수의 권유로 남성복을 런칭하였지만 패션계를 자시 떠났었고 그러던 중 벨기에 의류 제작사인 지세먼스와 파트너쉽을 이루고 2001년부터 자신의 "라프시몬스(Raf Simons)" 브랜드를 시작하였다. 그후 엄청난 이슈를 얻고 2003년에는 스위스 텍스타일 어워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2005년에는 프라다 그룹의 브랜드 질 샌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지명 남성복 디자이너인 라프 시몬스를 여성복 디자이너로 뽑혀 6년간 질 샌더의 수석 디자이너로 활동하였다. 그후 크리스찬 디올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나, 현재는 캘빈클라인에서 활동하고있으며, 새로운 캘빈클라인에서 "라프시몬스(Raf Simons)"만의 감성을 기대해본다.

글쓰기

이전 페이지

  1. 1
  2. 2

다음 페이지


왼쪽 아래 팝업 베너 열기
왼쪽 아래 팝업 베너 닫기 오늘하루열지않기